[정대협/정의연30주년 특별기고] 그 저녁의 뜨겁고 아픈 기억은 정진(精進)의 깃발이 되다 !
2020년 12월 2일그 저녁의 뜨겁고 아픈 기억은 정진의 깃발이 되다 !
-김혜원
(정대협 초대 할머니복지위원장,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건립 공동위원장 역임)
정대협(정의연)이 일본군에 의한 성침탈의 문제해결을 위해 발버둥 치며 활동한 지 30년이다. 지난 11월16일 후배 활동가들은 초기 선배들을 초청하여 지나간 활동의 자국들을 영상으로 보여주었다. 만 가지 감회가 서렸다. 참석자들 중 최고령자인 나.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뜨락에 선 나무들이 만추의 고운 옷을 뽐내는 날. 나는 어느새 허연 서리 머리에 잔뜩 이고 지팡이 친구해 서 있다. 가을나무 가지에 주렁주렁 달린 열매들처럼 지난 30년의 내 기억에도 시고 달달한 열매들이 따주기를 기다린다.
그 날 그 저녁. 계절은 12월의 한 복판. 할머니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바늘구멍 하나 꽂을 수 없을 만큼 빽빽이 들어찬 청중. 복도마저 통행이 막혔다. 높은 단상 위 매달린 수많은 조명등이 내뿜는 강렬한 광도의 빛과 열기. 단상의 할머니는 이런 청중들의 뜨거운 관심과 취재진들의 플래시 세례가 너무 낯설다. 지병인 천식으로 숨이 차건만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함에 조금도 흔들림 없이 말을 이어가는 김학순 할머니. 국내 최초의 증언자다.
“나가 이렇게 시퍼렇게 눈 뜨고 살아 있는데 그런 일은 없다고요?”
때는 1991년 12월 12일 저녁 7시, 장소는 도쿄에 위치한 조선기독교청년회관. 단상의 주인공은 고 김학순 할머니다. 김 할머니는 이날의 증언집회에 앞서 유족회(태평양전쟁희생자 유족회, 당시 총무 양순임)가 주선한 도쿄 법정에 출석했다. 곧 이어 나와 합류한 김 할머니는 도쿄에서 시작해 오사카와 근처 몇 도시에서 실시할 1주일간의 증언집회를 앞두고 있었다.
나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조직 안에서 정대협 창립 이전인 1988년 2월 12일에 윤정옥, 김신실과 함께 길고 험난한 이 운동을 향해 첫 걸음을 뗐다. 초기 할머니들의 용감무쌍한 증언을 보물처럼 지금도 싸 안고 있다. 그렇다. 시퍼런 눈 부릅뜨고 일본의 전쟁범죄, 그 중에도 악랄한 일본군 ‘성노예’ 사실을 온 세상에 폭로한 할머니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이야기들이 꿈틀댄다. 가해국 일본의 심장 도쿄에서 그 첫 말문을 열어젖힌 김 할머니를 수행했던 내 기억의 밀착 카메라에서 세 컷을 끄집어 내본다.

첫째 컷. 김 할머니의 도쿄 첫 증언 집회는 재일동포 여성들로 구성된 ‘우리여성 네트워크’의 주관으로 이뤄졌다. 할머니와 내가 집회 뒤의 흥분과 피로를 함께 나누며 휴게실 작은 방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자신을 기자라고 소개하며 젊은 일본 남성이 들어왔다. 그는 할머니 앞에 엎드려 넙죽 절을 했다. 통역을 통해서 전달한 그의 말은 이랬다. “오늘 밤 저는 일본 사람인 것과 남자인 것이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깊이 사죄합니다.” 그날 밤 할머니 앞에 엎드려 눈물 글썽이며 사죄하던 그 청년은 아마 지금 60살 가까이 됐으리라. 아직도 한 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일본 정부의 역사 인식 앞에 그는 얼마나 좌절하고 있을 것인가?

둘째 컷. 오사카후의 인권자료센터와 한 동포여성모임의 주관으로 열린 오사카 증언집회는 도쿄집회만큼 뜨겁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지했고 청중들은 눈물을 쏟으며 경청했다. 집회가 끝난 다음 질의응답 시간이었다.
“김선생님께 질문합니다.”
이제까지 피해자에게 쏟아지던 질문이 갑자기 내게로 날아왔다.
“김 할머니의 증언 집회에 다니시면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리라 예측하십니까?”
순간 나는 몹시 당황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이 동포 청년의 질문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글쎄요. 준비 안 된 답이라….도쿄와 오사카 집회에서 만난 언론의 뜨거운 취재 열기와 청중의 반성적 호응을 보면서 적어도 5년 내로는 해결이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그날 얼버무린 내 말이 30년 지난 지금에도 미해결로 남겨져 있는 이 문제의 난해함 앞에서 나를 아프게 찌른다. 일본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무지의 극치였다. 아마도 그 동포 청년은 일본에 오래 살면서 민족차별의 두터운 벽에 부딪쳐 무수히 깨졌으리라. 그리고 어쩌면 일본의 역사왜곡이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컷. 기억에서 사라진 도시의 이름. 오사카에서 차로 2시간의 거리였다. 그곳 YWCA와 동포청년 모임이 합세해 주관한 증언집회였다. 당시 한국 YWCA는 이 운동에 동참을 유보하고 있었다. 한국 Y와 달리 그곳 Y가 이렇게 증언집회에 적극적 참여를 하고 있음이 참 대견했다. 그곳 청중의 반응 역시 호의적이었다. 물론 주변에는 빨간 히노마루(일본국기)머리띠를 두른 우익들이 마이크를 잡고 소음 방해를 해 대고 있었다. 무사히 집회가 끝나고 휴게실에서 할머니와 쉬고 있을 때였다. 할머니를 꼭 만나고 싶어 하는 어느 일본 여성과의 대면이 이뤄졌다.
자그만 키에 검은 스커트와 흰 블라우스 차림의 40 대 초반 일본 여성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쭈볏거리며 어렵사리 털어 놓은 그의 사연은 또 이렇게 기가 막혔다.
“할머니, 저는 일본을 대신해 사죄합니다. 저는 전쟁 때 해군 장교였던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어요. 그런데 그 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저를 여자로 봅니다.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수녀원으로 들어갈 겁니다. 이 돈은 할머니 재판 진행에 써 주십시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 여성의 일본 돈 50만 엔(당시 우리 돈으로 약 500만원); 너무 아프고 정결한 돈이었다. 정대협은 이 돈을 <사료관 건립준비위원회>기금으로 비축했다.. 그 때 김 할머니는 벌써 유족회가 주관하는 도쿄재판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판 지원금은 따로 지출할 필요가 없었다. 뒤에 내가 초대 교육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 정대협(정의연) 최초의 교육관이 마련되었는데 이 익명의 일본여성의 성금이 그 초석이 되었다.
그날 저녁의 그 뜨거운 열기는 일본에서 사라졌다. 오히려 그들의 역사 후퇴가 우리를 분노케 한다. 정의와 평화는 결코 쉽게 오지 않는다. 우리의 피와 땀과 용기를 요구한다. 여성인권 회복의 길고 지난한 투쟁 가운데 기억해야 할 이야기들은 많고 많다. 이 운동과 관련해 우뚝 서 계신 김학순 할머니라는 거목. 그 큰 나무에 가지 친 이 세 사람들의 말들이 지금도 무겁게 다가온다. 그리고 나를 잠들지 않게 늘 깨우고 있다. 정대협 운동의 일선에서 떠난 지 오래건만 지금도 나는 이 운동의 디딤돌이 된다면 기꺼이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밝힌다. 이 세 사람들이 던졌던 말들이 아직도 내 앞에서 깃발 되어 더 나아가자고 나부낀다. 하느님의 공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그날까지. (2020, 11월 30일, 정대협 30주년을 회고하여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