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0차 수요시위 기자회견 - 이화여자대학교민주동우회
2020년 12월 16일1470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 기자회견도 간단한 기자회견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주관은 이화여자대학교민주동문회입니다.
이화여대민주동문회 김방희 부회장님의 사회로 시작한 수요시위 기자회견은 주관단체 인사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이어진 연대발언은 윤영애 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총무님, 공주대학교 사학과 우준하 학생, 제주 도련초등학교 5학년 5반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보내주신 글을 정의기억연대 활동가들이 대신 읽었습니다. 윤영애 전 정대협 총무님은 정대협, 정의연 30주년을 맞이해 ‘나와 30주년’이라는 A4 26쪽에 달하는 긴 글을 보내주셨는데 그중 정대협 설립과 김학순 할머니와 정대협이 만난 부분을 발췌하여 읽었습니다. 그리고 제주 도련초등학교 5학년 5반 선생님과 학생들이 정성스레 써 보내주신 손편지가 28통이었는데 시간상 선생님과 학생 다섯 명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에 대한 공부를 하고 영상을 보고 느낀 초등학생들의 생각과 마음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연대의 시간이었습니다.
이어 정의기억연대 한경희 사무총장의 주간보고 후 성명서 낭독을 끝으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1470차 수요시위 기자회견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유튜브 생중계 댓글로 함께해주신 정경심은무죄다, 신동혁공, 박은덕, 알마즈, 류가영, 이훈렬, 신미소, Hyeryung Chang, 장혜영, Woohee Kim, John Shin, tenaflym, Hs K, rainbird3939, Sung Sohn, 임계재, 최수희, 권명진, 우순덕, 이원석, Friends of ‘Comfort Women’ in Sydney - 시소추, 공정한사회, 정수연, Moses J Hahn(호주 시드니), Sewol Hambi Houston, 조안구달, 블루몬, 주나요TV, Moses J Hahn, kiz jkt, 이성례, Helen Choi, 해피Kelly, 서유리아, 원종민, 뭉살, 안정애, 렛서팬더, 송상곤, 초록베이비, 조아라, Jiu Won, 서울, mh& ji 님 고맙습니다.
음향 진행을 맡아주신 휴매니지먼트, 영어 번역 자원활동 해주신 김우희 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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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0차 수요시위 기자회견 연대발언_윤영애 전 정대협 총무(‘나와 30주년’ 중 일부 발췌>
1990****년 11****월 16일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목적은 종군위안부의 실태를 파악, 여론화와, 6개 항목 촉구, 이런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직으로 회장에 윤정옥, 서기에 김혜원, 회계에 김신실로 하고 실무는 한교여연의 방숙자 간사가 한교여연 충무 윤영애가 같이 일하기로 하고 사무실은 한교여연에 두기로 하였다. 이듬해 1991년 4월 정신대 문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대처하기위해 결집된 여성의 힘이 절실하게 요구되어 재개편을 하게 된다. 그것은 공동대표제였다. 정신문제 연구자로의 윤정옥, 운동체로 교회여성연합회 회장 박순금, 여성단체연합의 대표로 이효재로 하였다.
회장제의 정대협의 일차적 활동은 일본정부로부터 성의 있는 답변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11월 30일까지의 답변은 오지 않아 12월 6일 회의를 열고 12월 20일 공개서한에 대한 회신을 줄 것을 재요청하였다.
일본정부의 무성의와는 달리 일본 교회와 여성 인권 단체 등이 중심이 돼 정신대 문제를 다루는 많은 소모임들이 일본 곳곳에 활동을 하고 있었다. ⌜매매춘 문제와 싸우는 모임⌟⌜아시아의 여인들⌟⌜종군위안부 문제의 책임을 묻는 모임⌟ 등이다.
주한일본대사관의 답변
91년 4월 24일 주한 일본 대사관에서 일본정부의 답을 전하겠다고 해서 윤정옥 공동대표와 내가 갔다. 오노 참사관은 “일본정부의 조사결과 일본정부가 정신대를 강제 연행한 사실이 없고 배상 문제는 지난 65년 한 일 청구협상체결로 국제법상 양국 간의 권리와 의무가 끝나 불가하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공개서한을 보냈으니 공식적인 서신을 달라 했지만 오노참사관은 문서는 없고 구두로 정부로부터 받아서 답변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어서 지금 말한 것이라도 문서로 달라고 했지만 거절하였다. 그리고 오노참사관은 이어서 증거가 없다, 증거가 있다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볼 문제라고 했다.
뜻 있는 곳에 길이 있다더니
속이 뒤집어진 저는 기어코 증언자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원폭피해자 1세의 할머니들과 연령배가 비슷했다. 원폭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만나는 쪽쪽 오노참사관이야기를 전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정신대 할머니를 찾아야 한다고 당부하고 당부하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원폭피해자 1세인 이맹희 할머니가 취로사업을 같이하고 연동교회도 같이 다니는 분에게서 정신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전 간곡히 부탁을 드렸다. 제발 모셔 오시라고…
원폭피해자 1세 이맹희 할머니가 김학순 할머니를 모셔오다.
한 1991년 7월 아주 무더운 날 저는 원피해자 2세들과 같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을 기하여 “반전 반핵 평화마당”에 펼쳐질 연극을 본회 회의실에서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주연을 맡은 원폭 피해자 1세인 이맹희 할머니가 늦게 들어오시면서 “윤총무 이이가 바로 그 사람이에요. 정신대 할머니요”라고 했다. 그 순간 난 너무나 당황했다. 오매불망
첫 증언자 김학순 할머니
정신대로 끌려간 산 증인을 찾아내기를 바랐는데 엄청난 역사적 사건을 담은 분이 이렇게 내 앞에 막상 서계시니까 감당키 어려웠던 것이다. 인물이 좋으시고 품위있고 가냘픈 몸매였다. 그리고 지병인 천식으로 숨 가빠 하시면서 수심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이때 어렸을 때 읽었던 ‘밤비’ 사슴을 떠올렸었다.
녹음믈 해도 될까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할머니는 큰 한숨을 내쉬고는 “좋아요, 내가 여기 올 적에는 모든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요 역사의 증언을 하기 위함인데… 내가 살아있는데 어째 저들이 저렇게 당당하게 안 그랬다고 한단 말이오…” 그러면서 응어리진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한의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그 시대의 경험을 말하실 때 고통은 되살아나 할머니를 다시금 괴롭혔다. 열일곱 나이에 셀 수 없이 덤비는 일본군인들, 소리쳐도 도와줄 이 하나 없는 그 상황, 그리고 엄마를 불러대는 자신을 그리면서 말문을 닫고는 멍하니 벽을 바라보곤 했다. 원폭 피해자 이맹희 할머니의 권유를 받고 망설였지만 그 험한 길을 걸어오면서 죽지 않고 살아있음은 분명 “하늘의 뜻”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이 당한 것을 만천하에 고함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날 만나러 왔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고 나니 응어리진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 졌다고 했다. 그런데 난 반대로 마음이 너무 무거웠고 할머니의 고통이 전이되어 소화하기 힘들었다. 산 증인을 찾아내려고 그렇게 소망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막상 그 엄청난 역사적 사건을 겪어내신 분의 증언을 직접 듣고 있으니 꿈속에서 악몽을 꾸는 듯했다. 이를 공개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가슴을 쓸어내리며 우시던 할머니 모습이 자꾸 떠오르면서 망설이다가 한 달이 지났다. 어느 날 할머니는 전화를 주시면서 ”도대체 무엇을 하느냐고.. 저놈들이 날뛰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고 저를 책망했다. 할머니의 강한 의지에 용기를 내어 기자회견을 하게 된 것이다.
드디어 김학순 할머니 기자회견
8.15일 전날 기자 회견을 통한 할머니의 사연은 산천도 놀라고 초목도 울어야 했다. tv 와 라디오뉴스에 접한 다른 할머니들은 “나와 똑같은 경험을 한 분이 있구나” 하고 위로를 받았고 또 용기를 얻게 되고 신고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묻히기를 바랐던 저 일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가장 억압받고 소외된 자들이 일어설 때 역사의 변혁을 가져옴을 본다.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은 살아 움직여 전쟁 피해자로 좌절 속에서 숨어 살아야 했던 수많은 여성들을 깨워 흔들었다. 뿐 아니라 역사의 멍에를 지고 나라와 민족의 아픔을 자신이 싸안고 용기 있게 일어선 김학순 할머니로 인해 부끄러운 과거를 왜 들추어내느냐고 비아냥거렸던 사람들, 일본의 사관으로 역사를 본 역사학자들, 일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관료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일본, 미국 유럽 나아가 UN까지 영향을 미쳐 일본군‘위안부’문제는 전쟁범죄로 일본 국가가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한다는 권고를 하고 있고 국제노동기구(ILO)에서도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강제노동에 해당한다고 했다. 미국과 한국은 일본인 전범자에 대한 출입국을 거절하는 법도 만들었다. 할머니의 용기와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 앞에서 일본의 어떤 유혹도 맥을 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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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0차 수요시위 기자회견 연대발언_우준하 대학생
안녕하세요. 저는 이전에 충청평화나비에서 공주대지부장을 했던 공주대학교 사학과 우준하입니다.
오랜만에 평화로에서 시민분들과 마주 보며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코로나 19가 매우 심각한 상태로 확산되고 있어 직접 뵙지 못하고 연대의 글을 보내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군 성노예제에 대해 이야기하면 단지 과거의 아픈 역사로만 인식되고 있는거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봉기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일본군 성노예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제가 관심 있는 일본군 성노예제 최초 증언자인 배봉기 할머니는 식민주의와 냉전-분단체제에 의해 여성 인권과 국적을 상실한 시대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피해자입니다. 배봉기 할머니는 1944년에 취업 사기에 속아 오키나와로 강제동원되어 전시성폭력을 당했습니다. 1945년 일본군의 패전 이후 오키나와는 미군정이 시작되어 배봉기 할머니는 또 다시 미군 성노예가 되어 차별과 억압의 구조에 놓이게 됩니다. 1972년 오키나와가 미군정이 종식되고 일본으로 복귀하는데 이 시기에 일본 정부는 출입국 체제를 강화하여 배봉기 할머니를 불법체류자로 분류하여 한국으로 강제송환 하려고 했습니다. 배봉기 할머니는 자신의 몸이 이미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한국에는 미군이 주둔하여 무섭다며 고향 방문을 어려워하셨으며 오키나와에서 국적을 얻어 생계를 유지하고자 강제된 자기증명을 하셔야 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배봉기 할머니가 북측과 관련된 조선총련에 속해있다는 이유로 할머니를 외면합니다. 저는 배봉기 할머니가 살아온 과정이 끌려감과 버려진 구조 속에 놓여 있어 가슴이 아픕니다. 이러한 역사를 보더라도 일본군 성노예제는 동아시아의 식민주의와 냉전-분단체제, 민족주의와 계급, 군사주의와 여성 인권 등에 의해 중층적 차별과 억압의 구조에 놓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가 진정한 해결의 길로 나아가려면 우리 시대가 직면한 미국 중심의 한반도 분단체제에서 벗어나야 하므로 하루 빨리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한반도 종전선언을 통해 아시아의 평화로운 국면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는 이 세상에 전시성폭력이 재발하지 않도록 일본군 성노예제의 역사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다짐을 실천하고자 며칠 전에 일본군 성노예제를 연구하는 성공회대학교 국제문화연구학과 석사 과정에 합격했습니다. 평화로에서 여러분들이 제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 외침에 함께 할 수 있도록 좋은 무대를 만들어주신 덕분에 합격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 일본군 성노예제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여 역사 진실 규명에 기여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연대하여 평화로운 아시아의 국면을 만들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