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1500차 수요시위 기념 에세이 공모전 선정작

2021년 7월 20일

1500차 수요시위 자료집 E-BOOK: https://issuu.com/womenandwar.kc/docs/1500_

1500차 수요시위 자료집다운로드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전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시작된 수요시위가 2021년 7월 14일, 1500차를 맞이합니다. 지난 29년 동안 수요시위는 전쟁범죄 인정, 진상규명, 공식사죄, 법적배상, 책임자 처벌, 역사교과서 기록, 추모비 및 사료관 건립의 일곱 가지 요구를 바탕으로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 회복을 위한 연대의 장이자, 평화와 여성·인권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정의기억연대에서는 1500차 수요시위의 역사적 의미를 참여자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통해 되새기고자 국내외 청소년 및 성인을 대상으로 ‘1500차 수요시위 기념 <나와 수요시위> 에세이 공모전’을 실시했습니다. 공모전을 통해 매주 수요일 12시, 평화로에서 만난 다양한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수요시위에 대한 추억과 생각을 기록하고자 했습니다.

지난 6월 30일 에세이 공모전 마감 결과, 총 15건을 선정했으며, 선정작은 아래에 공개되어있습니다. 응모작들은 추후 발간될 <1500차 수요시위 자료집>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수요시위에 대한 소중한 추억과 경험을 글로 나눠주신 응모자 여러분들과, 그 동안 수요시위에 함께 연대해주신 수많은 세계 시민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초등 - 조한나

저는 요즘 평화배움 주간이라 평화와 위안부를 배우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위안부에 대한 영화나 학습지,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 영상처럼 여러가지를 많이 준비해 주셔서 위안부에 대해 잘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위안부를 배우면서 위안부는 강제로 일본군에게 성폭력을 당한 소녀들을 뜻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일본에게 화가 났습니다. 일본이 위로해주는 단체, 위안부라고 부르는 것도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런데 오늘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온라인으로 2021년-1500회 수요집회를 참여했습니다. 제가 하고 있던 위안부의 대한 생각이 수요집회를 참석하면서 더 났습니다. 그리고 수요집회에서 위안부 피해자인 순옥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 안타까워졌습니다.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이 행복하게 지내셨으면 하는 마음도 같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위안부 할머니들께 우리반 친구들과 함께 편지를 써서 온라인으로 보냈습니다. 저는 그런 시간이 다시는 오지 않았으면 하고 오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본이 단지 정성을 다해 위안부 할머니들께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사과를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본이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과 그 상황에 대한 공감만 해 주어도 위안부 할머니들께는 큰 위로가 되시고 마음이 편안해지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평화배움 주간을 겪으며 위안부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배운점도 많았습니다. 평화란 무엇인지, 평화를 실천하신 인물들은 누구신지를 배웠습니다. 저는 평화를 배우면서 평화는 행복과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행복은 희망이고 축복은 은혜니 저에게는 그게 평화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평화를 지키려면 노력이 필요합니다. 서로서로 배려하며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쉽게 들리지만 이것들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전쟁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는 제가 말한 “배려”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저의 평화서약을 쓰겠습니다. 1.나는 어려워하고 있는 친구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도와주겠습니다. 2.화가 나도 내가 화가 난 이유를 생각해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3.나는 나와 다른 종교, 다른 인종, 다른 성격이라고 무시하거나 다투지 않고 다름을 인정하겠습니다. 4.나는 다른 사람이 불편할만한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상으로 제 평화서약을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실천하신 인물들 중 10대 평화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와 여성인권을 주장하는 말랄라 유사프자이 등의 인물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인물들이 좋아졌습니다. 그레타 툰베리는 자신의 생각을 용감하게 SNS에 밝히고 있고,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반대세력의 총에 머리를 맞고도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용기가 닮고 싶습니다. 그리고 닮도록 노력해 봐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위안부 할머니들께 편지를 쓰겠습니다. -할머니들께할머니! 할머니께서 나쁜 기억 다 잊으시고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지내세요. 그리고 일본이 사과할때까지 계시고 꼭! 일본에게 사과 받으세요! 화이팅! -한나올림

초등 - 이서현

우리 학교는 남양주시에 있는 12학년 까지있는 기독교대안학교 밀알두레 학교이다.나는요즘에 학교에서 평화에대해 배우고있다.왜냐하면 학교에서는 이번주가 평화 주간이기때문이다.요즘엔 위안부에 대해 배우고 있다.위안부에 관한 책도읽고 영상도 보고있는중 선생님께서 온라인으로 수요집회에 참석하도록 도와주셨다.수요집회에 참여하며 느낀점은 위안부에대해 생각보다 많은 관심이 쏠려있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마음아파하고있다는걸 느꼈다.나는 학교에서 평화를 배우며 많은것을 알게 되었다. 평화를 위해노력한인물들,평화란무엇인지,그리고위안부에대해서도배웠다.나는평화란“봄”이라고 생각한다.왜냐하면 봄은 따뜻하고, 생기가돌고,밝은 계절이다.나는 그런게 평화 라고 생각한다.서로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가고 생기가돌고 밝은 그런게 평화 라고 생각한다.내가평화를지키기위해 할 일은 배려이다. 조금만 더 배려해 주려고 노력 하면 우리에게 평화가 찾아올것같다.나는 평화서약을 이렇게 쓸것같다. ‘나는 평화를 위해 아래내용을 지키려고 노력하겠습니다. 1.나는 평화를 지키려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나는 평화를 지키려고 배려를 실천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3.나는 평화를 지키려고 믿음을 실천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이것들을 잘 지키려고 노력해서 평화를 지키고 싶다.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게있다.위안부 할머니들은 모두 일본을 미워하는지 궁금하다.우리반 친구들도처음에 위안부 얘기를 듣고 일본에게 불만을 가졌는데 직접 위안부 피해를 당하신 할머니들은 더욱더 불만을 가질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우리반 친구들이
불만을 가지자 선생님께서 일본은 잘못한게없고 위안부가 잘못했다고 하셨는데 그런 생각을 갖으시는 할머니도 계실것같다.그래서 나는 그런점이 궁금하다.최근 수업에서는 평화에 대한 책갈피를 만들어서 2학년 동생들에게 평화주의자 발표와 함께 책갈피를 나눠주는 활동도하고,위안부 할머니들께 힘이되는 한 마디를 적어서 우리반 친구들 다같이 사진을 찍는 활동도했다.그리고 6.25전쟁을 맞이해서 주먹밥으로 삼행시 짓기와 주먹밥 먹기 행사를 한 적도 있다.주먹밥 먹기 행사는 오늘 학교급식에서 주먹밥과 감자만 나오는 것이다.그리고 삼행시 짓기 행사는 초등전체가 참여하는건데 나는 이렇게 썼다. 주-주사위는 던져졌다! 먹-먹지도 못하고 밥-밥조차 재대로 먹지 못하는 게임 6.25 전쟁! 6.25전쟁이나위안부처럼 평화가 깨지는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마음이 아프다.나도 평화에 대해서 배웠으니 이제 앞으로 평화를 잘 지키려고 노력해야겠다.여러분 평화를 지키도록 노력해주세요~!

초등 - 이소현

시작하기 전부터 일본에게 끝까지 사과를 받겠다는 의지와 열정이느껴져, 나까지도 의욕을 오르게 한것 같다. 또 할머니들의 아픔을 다시 한번 읽어주셨다. 그다음, 인사말부터가 이사실을 알게되고 나서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다시한번 느낄수있었다.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들에게 진실의 목소리가 닿을때까지 맞서고 포기하지 않겠단 마음이 확실히 느껴졌다. 그래서 다른사람에게도 그 마음과 뜻이 확 와닿는 느낌이다. 모두가 일본에게서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그 한마음으로 1500회 수요집회까지 달려가고있다. 사람들의 열정이 단하고 이제부턴 나도 함께하고 싶다.
수요시위 에서도 무슨문제인지도 몰랐다는데 겉으로만 도왔다는 사람이 있었던것같은데, 나도아직 뭐가문제인지도 정확히는 깨닫지 못하고있지만, 공감하는 마음만을 있다. 모든사람들이 겉보기에만 도와주고 공감하지 못하는것보단, 위안부 할머니들을 공감하고, 품어주면 좋겠다. 할머니들이 이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면 좋겠다.
수요시위는 일본에게 사과를 받아내겠다고 다짐하는 나의 의욕을 올려주었다. 기회가 또 온다면 또다시 참여하고싶다. 수요시위는 진실를 밝히고자하는 사람들의 뜻이 담겨있는 모임이였고 많은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면 좋겠다.

초등 - 김민건

내가 수요시위에 처음 참석한 것은 작년에 코로나 때문에 수요시위를 온라인으로 한다고 엄마가 같이 참석해보자고 해서였다. 마침 코로나 때문에 학교도 안 가고 심심했는데 수요시위를 라이브로 집에서 보면서 엄마랑 형이랑 호떡도 만들어 먹고, 바위처럼 춤도 따라 추면서 즐겁게 참석했다. 내가 바위처럼을 추는 것이 챌린지로 나와서 그 다음부터 다른 사람들도 바위처럼 챌린지를 하게 돼서 되게 좋았다. 그리고 나는 작년 여름 드디어 진짜 수요시위에 참여하러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 가보았다. 아무래도 수요시위에 가는 것이니 지난번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에서 산 김복동 할머니 옷을 입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갑자기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생각 하니 그때 노란 나비에 다짐을 써서 벽에 붙였던 것이 기억 난다. 나는 노란 나비에 ‘베트남에 진심으로 사과하고 일본이 하루빨리 사과하길’이라고 썼고, 형아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일본이 사죄하기 전까지 절대로 시위하는 것을 멈추지 않겠습니다’라고 썼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수요시위 현장에 도착했다. 수요시위 현장에는 방송국 카메라가 엄청 많았다. 카메라가 쫙~ 깔려 있으니 조금 무섭기도 했다. 엄마가 수요시위 현수막을 잡고 있을 사람을 구한다고 나랑 형한테 해보겠냐고 제안했다. 형은 싫다고 했는데 나는 해보고 싶었다. 지금 생각 해보면 참 잘했다고 생각 한다. 왜냐면 내가 이날 김복동 할머니 옷을 입고 왔고 이날이 마침 수요시위가 기자 회견으로 바뀐 제 1447회차 수요시위였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이라 카메라가 엄청 많이 온 것이었다. 나는 김복동 할머니 옷을 입은 내가 현수막을 들고 있는게 오늘 수요시위에 가장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수요시위에 다른 사람들도 모두 김복동 할머니 옷을 입고 올 줄 알았는데 나만 입고 와서 조금 놀랐다. 현수막을 들고 있으니 굉장히 긴장이 되었다. 이렇게 많은 카메라 앞에 섰던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움직이지 않고 현수막을 꼭 붙잡고 있었다. 김복동 할머니 옷을 입고 있으니 그렇게 해야할 것 같았다. 김복동 할머니를 한번도 만나지는 못했지만 영화 김복동에서 봤을 때 할머니라면 수요시위에서 절대 움직이지 않고 현수막을 끝까지 들고 계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시간이 굉장히 느리면서도 빠르게 간 것 같다. 수요시위에 참석해보니 뭔가 사회에 기여(?)를 한 기분이 들었고 할머니들에게 힘을 드린 것 같았다. 이렇게 수요시위에 참석한 이야기는 끝이다. 이제부턴 나의 수요시위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과 수요시위에 나간 후에 바뀐 생각을 쓸 것이다.
수요시위에 나가기 전에도 나는 수요시위에 조금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하지만 정확히 그리고 자세히는 잘 몰랐다. 그러다가 지난번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에 간 이후로 수요시위를 무엇을 위해, 또 왜 하는 것인지 잘 알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일본은 왜 사죄를 안 하는지 그전에는 잘 몰랐다. 하지만 지금도 잘 모르겠다. 잘못 했으면 사과를 하면 되는데 사과 한마디가 뭐가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영원히 사과를 받지 못할 거라는, 그저 이 사건이 역사 속으로 묻혀버릴 것이라는 생각도 가끔씩 들긴 한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일본이 사죄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할머니들이 그동안 고생하신 것과 그동안 겪었던 고통이 조금이라도 낫길 바란다. 그리고 다시는 전쟁과 같은 인간을 괴롭히는 일들이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

고등 - 김다옴

나이는 **90,** 이름은 김복동입니다**.****”**

김포제일고 2년 김다옴

“학생들, 끌려가지만 말아” 라며
평화의 소녀상을 지키던 청년 언니, 오빠들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시던 김복동 할머니는 2019년 1월 29일 장례식장 영정사진 안에서 그렇게 환하게 웃고 계셨습니다. “나비되어 훨훨 날으소서”
서울시청 광장에서 일본대사관 앞까지 마지막 배웅을 해드리며 고개 숙여 명복을 비는 추모의 마음
무게만큼 두려움의 무게도 같이 왔습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지?
우리가 잊지 않을 수 있을지?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그 추운 날 보내드린 할매나비께서는 2019년 8월 8일 영화<김복동>으로 스크린 안에서 웃고, 울고, 외치며 ‘모두가 알아야 하고 알려야 하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나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지만, 그래서 지금도 매주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에 서서 우리에게 명예와 인권을 회복시키라고 싸우기를 계속하고 있지만 지금
세계 각지에서 우리처럼 전시 성폭력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여성들을 돕고 싶습니다. “
김복동 할머니의 선언입니다.

일본군으로부터 갖은 고초를 당했던 그 소녀는 94세의 여성인권운동가로 2015년 12월 28일 일방적인 한일합의가 이루어지던 그 날에도 차가운 눈보라를 맞으며 수요시위에 계셨습니다.
화해는 가해자가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피해자가 원하지 않은 합의를 진행해 놓고 10억엔을
받아 재단을 운영하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폭력입니다!

할머니는 ‘일본군 성노예입니다.’
‘성실한 사죄를 했다’, ‘충분한 보상을 했다’라는 일본인들의 망언은 어긋난 역사를 아직도 부끄러움
없이 세계 곳곳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만행은 할매나비만의 투쟁이 아닙니다.

전국에 112개의 평화의 소녀상은 할머니를 기억하는 것뿐만 아닌 ‘김복동’ 그 자체입니다 소녀상을
세우기 위한 노력만큼 소녀상을 지키고 관리해 다음 세대까지
전하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우리 동네 김포시 청소년으로 우리가 바로 김복동입니다!
우리가 바로 증인입니다!

고등 - 이상엽

“나의 수요시위 “ – 부제 : 내가 애국하는 길

김옥선 할머니께

“애국하는 길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다. 내 나라가 나를 지켜야 나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

할머니의 말씀이 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매일 당연히 하는 공부인데 그 자체가 애국하는 길이였다니 저에겐 새로운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애국하고 있습니다. 묵묵히 제일을 하는 게 너무도 자랑스럽고 고3을 지나 대학에 가면 할머니께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할머니를 뵙고 할머니께서 참여도 하시는 수요집회에 좀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유튜브로 현장을 느끼면서 할머니께서 전하려고 하시는 메시지를 들을 수도 있게 되어 참 좋아요. 할머니들의 진정 어린 목소리로 변화가 올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요.

일본은 왜 사과를 안하고 있는 걸까요?  일본은 아직도 위안부를 부정하며 역사왜곡하고 있을까요? 아픔의 상징인 소녀상은 왜 철거하길 원할까요? 생각해보니 너무 화가 나네요. 벌써 27년째 수요집회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에 전세계에서 이 문제를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저 하나는 작지만 수요집회에서 연대참여를 통해 그들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함께 노력하려고 하고 있어요.

할머니, 할머니의 용기가 너무 멋지시고, 그 용기로 침묵하고 있던 많은 이들을 움직이게 해 주신 점 감사 드려요. 자주 수요집회 나오셔서 말씀해 주세요.

일본은 진정성있는 사과와 전쟁 없는 세계를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모든 나라에 대해 메시지를 전해주세요. 트럼프가 이 말을 한다고 강한 메시지일것 같지 않아요. 할머니와 함께한 수요일, 이 수요집회가 더 힘있고 강하게 전달되어 질것이라고 믿어요. 매주수요일 비오는 날이나 추운 날이나 소녀상 옆에서 오늘도 응원무용을 하시고, 마이크를 들고 사과와 평화를 외치고 계실 할머니들과 뜻을 함께하는 대단하신 분들을 보며 저는 항상 응원하고 대학가면 함께 하고 싶습니다.

1500회까지 많은 노력하신 시간을 바탕으로 이번 수요일 이후로도 많은 여성들의 인권과 평화, 아픔을 더 이상 감추지 않고 세상에 말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이용해서 세상에 알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 주신 할머니께 너무 감사한 마음 가득합니다.

할머니, 꼭 일본에게 사과를 받고, 할머니들께서 마음 편히 사시는 날이 하루빨리 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앞으로 저에겐 수요일은 매주 의미있는 요일일 것 같아요. 내가 대단한 일을 동참하고, 메시지도 전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해서, 나라도 부강하게 만들고, 다시는 아픔을 겪지 않게 하겠습니다. 저희 삶의 좋은 방향을 제시해 준 할머니께 언제나 감사 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수요일에 또 뵈어요, 할머니.

                                         2021. 6. 30

                                            이상엽올림

일반 - 전지윤

바위가 온 몸으로 흘리는 땀과 눈물이 보인다면 

이토록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정의연(정대협)의 수요시위에 솔직히 나는 지난해 여름에 처음 제대로 가본 것 같다. 그 전에도 몇 번 참가한 어렴풋한 기억이 있기는 하지만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참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당연히 지지해야 마땅한 의미있는 투쟁이라고 생각했지만, 나같은 별 거 없는 사람까지 적극 참가하지 않더라도 이미 많은 관심과 지지를 받고 있고, 많은 것을 이뤄낸 대단한 투쟁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지난해 봄부터 여름에 걸쳐 일어난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에 대한 전사회적 비난과 공격은 그만큼 더 당혹스럽고 안타까웠다. 원래부터 적대적이었던 사람들뿐 아니라, 무관심하거나 중립적이었던 사람들은 물론, 우호적인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까지도 우르르 한쪽으로 몰려가면서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을 향해서 돌을 던지는 모습은, 이럴 때일수록 수요시위에 참가해서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마음이 들게 했다.

특히 당시에 나는 보수언론이나 우파적 정치인과 지식인들보다는 진보개혁적이거나 좌파적인 언론과 정치인, 지식인들의 태도에 더 큰 충격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아마 주변에서 지켜보던 나보다도 공격받던 당사자들이 느낀 상처는 더 컷을 것이다. 특히 손영미 소장님의 비극까지 벌어지고 나서, 그 상처는 영영 아물 수 없는 것이 됐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정의연의 역사나 활동, 이 문제에 있어서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 기득권 우파세력들의 책임 등을 누구보다 더 잘 알만한 분들이 온라인 상에서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을 비웃고 탓하는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을 보고서 느낀 서글픈 감정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것은 마치 내가 아주 어릴 때 살던 서울 변두리의 한 동네에서 깡패들이 어떤 사람을 길거리에 끌고 다니면서 폭행하고, 그 사람이 비명을 지르고 피를 흘리는데도 구경만 하면서 수군거리며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을 보면서 느낀 이상한 괴로움과 닮아 있다.

또, 그것은 내가 중학교 때 교실 뒤편에서 ‘일진’ 아이들이 어떤 친구를 괴롭히고 때리는데 그 교실의 아이들이 웃으면서 지켜보거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못 본 척하면서 자기 일만 하던 광경에서 느꼈던 괴로움과 닮아있다.

나아가, 그것은 내가 한때 속해 있었던 운동단체에서 나와 입장이 달랐던 지도부가 갑자기 나를 야비한 사기꾼 취급하며 비난하고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거의 모든 동료들이 거기에 동조하면서 너도 나도 나를 향해 돌을 던지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런 사람들만 미워하고 탓하고 싶지는 않다. 정파와 진영과 입장의 차이로 나뉘어서 서로 벽을 쌓고 감정을 키우고, 누군가 힘들 때 서로 돕기보다는 등을 돌리는 우리 사회의 풍토, 거기서 별로 자유롭지 않고 가끔 더 심한 측면도 있는 운동사회의 풍토가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주류 기득권층은 이것을 의식적으로 이용해 왔다. 

그것의 핵심은, 비명을 지르고 피를 흘리는 사람을 구경만 하며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에게, ‘일진’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친구를 웃으며 지켜보거나 못 본 척하던 아이들에게, 자신의 행동과 반응을 스스로 정당화할 근거를 제공하는 것에 있다.

비명을 지르고 피를 흘리는 저 사람에게 잘못과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일진’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에게 이러 저런 결함과 실수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사회운동가들은 주류사회로부터 단지 ‘빨갱이’라는 딱지만이 아니라, ‘파렴치한 위선자’라는 도덕성에 대한 공격을 받아왔다.

1940년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때 조선공산당 활동가들은 미군정 경찰에게 위조지폐로 검은 돈을 모은 범죄자라고 낙인찍혔다. 1960년대 FBI는 마틴 루터 킹이 앞으로는 정의를 말하면서 뒤로는 성적인 일탈을 저지르는 위선자라고 공격했다. 

심지어, 그런 비난과 공격은 때에 따라 일부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 아무리 훌륭하고 헌신적인 사회운동가라도 결국은 인간이기에 결함과 문제가 있고, 잘못과 실수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문제의 본질이었을까? 미군정 경찰이 지적한 조선공산당 활동가들의 잘못이 본질이었다고, FBI가 지적한 마틴 루터 킹의 도덕적 결함이 본질이었다고 생각하고 비난에 함께하고 동조, 방관했던 사람들은 과연 지금도 그것이 옳았다고 생각할까?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에 대한 전사회적인 비난과 공격에 동조하거나 침묵했던 분들에게, 그런 비난과 공격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던 사람의 심정에 감정이입하길 기대하는 게 무리라면, 본인 자신이 그런 처지가 된다면 어떨지 상상해보기라도 기대해 본다.

특히 나와 가까운 관계라는 이유로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그 소용돌이 속에서 같이 허우적거려야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심정이 어떨지 상상해 봤으면 한다. 차라리 내가 당하면 당했지 사랑하는 이의 괴로움을 보기는 끔찍하게 싫은 것이 대개의 마음이다. 그래서, 언제든 이런 소용돌이로 말려들 가능성이 있는 사회운동가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가족 관계를 맺거나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서글픈 생각까지 든다. 

물론 지난 1년간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에게 닥친 시련 속에는 피해자와 연대자(조력자)의 관계라는 매우 조심스럽고 결코 풀어나가기 쉽지 않은 문제가 존재한다. 특히 오랫동안 켜켜히 쌓이고 뿌리가 깊은 사안일수록 더욱 그럴 것이다. 이미 정의연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피해자와 연대자 사이의 갈등과 반목, 그것이 낳은 위기, 그것을 이용한 외부의 공격이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  

서로 경험과 위치와 삶이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피해자와 연대자로 만나서 함께 역사의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과정은 너무한 소중한 것이지만, 동시에 길고 힘든 과정 속에서 서로에게 쓰라린 감정, 오해, 상처도 남길 수 있다. 실타래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생긴 그 뒤엉킨 매듭들을 풀어나가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구나 언제든 그 뒤엉킨 부분을 더욱 꼬이게 만들면서 실타래 전체를 엉망으로 만들려는 구조와 세력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실타래를 풀려고 하다가 그런 매듭들을 만들어냈냐고 연대자들(피해자들도)을 큰 소리로 비난하고 탓하기 보다는 조용히 기다리며 조심스럽게 도움과 의견을 줄 수는 없는가. 이미 우리들 중에 그 누구보다도 그 실타래와 매듭들을 잘 알고 오랫동안 애쓰며 풀어온 사람들이 저기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바위처럼’ 묵묵히 견디고 있으니. ‘바위처럼’ 버티던 사람이 온 몸으로 흘리는 땀과 눈물이 보인다면.

일반 - 박미라

제목**:** 나와 수요시위

                                                   부제: 1342차 수요 시위를 다녀와서…

2018년 2월 28일(수) 1324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다녀왔다.

낮 12시 주한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서 수요시위를 하는데 (사)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주최하고 화성여성회에서 주관을 한 수요 시위였다.

수요시위에는 200여명의 참석자들이 모였는데 곳곳에는 ‘소녀의 눈물 역사가 기억한다’ ‘늦으면 늦을수록 어려워집니다. 빨리 사과하세요’ ‘할머니께서 진심 어린 사과를 필요합니다.’라는 작은 손 피켓을 들고 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수요 시위를 하기에 앞서 그곳에 모인 우리들은 한 목소리로 율동과 함께  ‘바위처럼’을 부른 후 한미경 화성연대여성회대표는 “우리에게는 역사를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맞이하는 3.1절 아픔은 온전하게 해결되어야 할 숙제들이 함께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인사말을 했다.

윤미향 정대협 공동대표는 경과보고를 통해 ”우리는 그날로부터 99년째 봄을 맞이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봄 하면 희망이 떠오르고 얼어붙었던 땅도 스스로 녹고 얼음을 채웠던 땅에서 아지랑이가 스물스물 올라옵니다. 생명은 두텁고 죽었던 것 같았던 그 딱딱한 껍질을 깨고 솟아오릅니다. 생명은 그렇게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면서 ”어느덧 짓누르고 억압한다고 해도 생명을 가진 희망은 우리들 앞에 꽃으로 피웁니다. 그게 바로 봄입니다. 지난 99년을 봄인 것처럼 살았지만 진정한 봄을 맞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라면서 마지막으로 ”사람다운 세상을 꿈꾸며 전국 각지를 외치면서 할머니들에게 인권과 전쟁을 반대하는 일본정부에 사죄하고 배상하라는 외침이 있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했다. 그리고 평화의 목소리, 만세의 함성, 평화의 함성을 일본대사관을 향해 와~~~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1324차 수요집회에 뜻 깊은 자리가 마련되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의 고통을 이겨내시고 일본 정부를 향해 정의를 맞서서 외치며 일본군 성 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시는 피해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백만 시민이 드리는 여성 인권상 수상식이 있었다. 이 여성 인권상은 오랜 시간 인권 평화 운동가로 활동 해 오신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드리는 상인데 2015년 12월2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무효화 하라고 요구하면서 끝까지 일본에서 준 위로금을 거부한 가족들에게 백만 시민들이 모금한 돈으로 만든 상이므로 의미가 더 담겨져 있는 상이 아닐까 싶다. 올해 여성인권상은 지난 2015년 5월 향년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효순 할머니에게 드렸다. 이미 고인이 되신 이효순 할머니를 대신해서 아들인 이동주님이 수상을 했는데 이동주님은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어머니는 모든 이의 어머님이셨습니다. 어머니의 정신을 잊지 말고 같이 노력해 나가겠습니다“라고 수상소감을 말했다.

수상이 끝난 후 문화공연도 있었는데 가야금 병창인 정혜심님은 ’모두 다 꽃이야”를 참석자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아무데나 피어도 생긴대로 피어도 이름 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라고 노래를 부르는데 이 세상에 태어나서 꽃이 아닌 사람이 없듯이 살아계신 할머니들도 꽃이고 이미 고인이 되신 할머니들도 꽃이었을 것이다.

이어서 원당중학교 학생들이 자유발언을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서 학교에서 쿠폰을 만들어 카페를 열어 커피와 차를 팔아 모은 344,500원을 나비기금으로 기부를 해 그곳에 모인 참가자들을 훈훈하게 만들었으며 오색 빛깔 어린이들은 ”’위안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습니다. 나와는 상관없고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 알게 되어서 친구들과 함께 수요 시위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또한 외국어고등학교 일본어과에 다니는 학생은 일본대사관을 향해서 일본말로 강력하게 항의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마지막으로 화성여성회에서 성명서 낭독을 통해 피해자의 이름으로, 국민의 이름으로 일본정부에 강력히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면서 제1324차 수요 시위를 끝마쳤다.

그 전날 충격적인 뉴스가 눈과 귀를 사로잡은 일이 있었는데 서울시가 후원하고 서울인권센타팀이 3년 반 동안  ’위안부‘ 자료를 추적을 한 내용이었는데 조사하고 발표하는 내용은 바로 일본군이 조선에서 끌려간 여성들을 성 노예로 부려 먹고 전쟁이 끝날 때는 총으로 학살한 것도 모자라서 땅을 파서 한 구덩이에 몰아넣은 사진은 충격적이지 못해 처참하기까지 했다.

‘I am sorry 그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습니까?’와 ‘꽃은 절대 지지 않습니다.’라는 피켓을 든 어느 중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다가옵니다.

추신: ‘위안부’에 따옴표를 표시하는 이유는 범죄를 축소하는 완곡한 표현이지만 그 역사적 실제성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고 있으며 범죄의 주체인 일본군과 이것이 역사적 용어라는 바를 꼭 밝히기 위해 작은 따옴표를 붙여 표기함.

일반 - 박경주

수요일을 기억하다**,** 소녀들을 기억하다

 나의 첫 번째 수요시위 참여는 2015년 2월, 첫째 수요일이었다. 오랜만의 고국 방문이라 찬 겨울임에도 여러 가지 계획을 촘촘히 세웠다. 그중 수요시위 참여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이다. 딸을 데리고 전철을 타고 일본 대사관 앞을 찾아갔다. 함께 수요시위에 참여해 아이에게 일제강점기 당시 행해진 일본의 전쟁범죄와 만행에 대해 알려주고, 그 당시 겪었던 아픔을 지금까지 고스란히 감당하며 살아가야 하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 관한 이야기도 들려주고 싶었다. 찬 바람이 두꺼운 코트를 헤집고 들어올 만큼 추웠던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우리가 도착하니 벌써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학생들이 많이 참석한 것이 인상적이었고, 모인 분들의 눈빛에서 진실을 밝히려는 뜨거움이 느껴졌다. 수요시위가 끝나고, 처음 만나는 ‘평화의 소녀상’과 사진을 찍었다. 소녀상 옆 의자에는 꽃바구니, 빨간 장갑, 유자 주스, 초록 화분 등이 놓여있었고, 소녀가 추울까 걱정이 되었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울긋불긋 따뜻하게 꽁꽁 싸매어져 있었다. 소녀와 찍은 그 사진은 지금도 전화기에 곱게 저장되어 있다.

 이날 수요시위의 참여는 한국 역사가 낯선 아이에게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전쟁폭력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광화문 광장에 들러 세월호 참사 희생자 아이들의 사진을 하나하나 살피며 눈물 지었던 기억도 있다. 마땅히 보호받아야 하는 과거의 소녀들과 현재의 아이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폭력 속에서 아픔을 당하는 것을 마음으로 함께 한 날, 참으로 무거운 날이었다.

 같은 해 6월 29일, 김복동 할머니께서 방문하셨다. 위안부 피해자 입장을 넘어 전쟁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보듬어 주고, 함께 평화의 세상을 열자는 취지를 갖고 평화나비 운동을 지지하신 날이었다. “일본 정부에서 받을 보상금 전액을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해 쓰겠다“는 말씀을 하셔서 큰 감동을 받았다.

김복동 할머니를 모시고, 7월 1일 워싱턴 디시에 있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 1185차 수요시위가 열렸다. 위안부 피해자로 활동을 시작해 치열한 여성운동가의 모습으로 삶을 마무리 하신 김복동 할머니. “내 소원은 죽기 전에 일본이 사죄하는 것을 보는 것과 남북통일을 위한 평화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라고 힘 있는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할머니께 그 자리에 참여했던 워싱턴 시민들은 “할머니, 힘내세요”라는 외침으로 답했다.

 2019년 10월 27일, 드디어 버지니아 애난데일 한국일보 건물 앞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2016년 11월 워싱턴 디시에 도착했으나, 거의 3년을 창고 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던 쓰라린 기억이 있다. 2017년에는 버지니아 솔즈베리 대학교 교정에 세우기로 하고 건립일까지 정했다가 무산되기도 했다.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 날, 길원옥 할머니께서 멀리 이곳까지 오셔서 마음을 보태 주셨다. ‘워싱턴 평화의 소녀상’은 지역에서 평화의 상징이 되었고, 전쟁과 폭력의 역사적 사실을 공부하고, 아픔에 공감하는 교육의 장이 되었다.

 2020년 6월, 1445차 수요시위를 애난데일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열었다. “일본 정부는 사과하고, 보상하라”,”할머니들에게 정의를, 위안을, 명예를” 등 구호를 함께 외치고 마음을 모았다.

 코로나 19로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기간에는 온라인으로 열리는 한국의 수요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마스크를 쓰고 각자의 의견을 발표하는 학생과 시민들을 큰 박수로 응원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살고 있어 한밤중 수요시위가 되기도 하지만,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는 뜨거운 바람이 먼 곳에 사는 나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일본 정부가 할머니들이 명예와 인권을 존중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그 날까지 수요시위는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평화의 소녀상’을 바라보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지금도 견디고 있는 기나긴 거짓 역사의 상처를 가늠해본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진심으로 머리 숙여 깊이 사과하라!

 위안부 피해자들이 가진 깊은 마음의 상처와 여전히 아물지 못하는 몸 구석구석의 잔인한 흉터들에 대한 가해를 인정하라!

 폭력을 정당화하고 의도된 폭력을 거짓으로 덮어버렸던 그 긴 시간을 보상하라!

 아픈 자신의 속내를 내려놓고, 올바른 역사를 만들어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내하고 계신 모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존경합니다. 그 귀한 말씀과 행동에 감사드립니다.

 매주 수요일, 한자리에 모여 정직한 역사를 쓰려 노력하는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정성껏 적어가고 있는 새역사를 기대합니다.

일반 - 임계재

초가을, 여전히 땀 흘린 몸으로 인사동 지인의 화랑에 들렀습니다. 작은 화랑에 조각작품 전시가 있더군요.

“누나, 수요집회 다녀오시는 거예요?”

“수요집회?”

키가 훌쩍 큰 작가인 듯한 남자가 키만큼이나 눈을 크게 뜹니다.

가난한 시절 서울로 오면 대수라도 나는 듯 보따리를 든 애잔한 시골처녀의 모습에 유독 걸음이 안 떨어집니다.

수다쟁이인 저는 그 전시회를 수요일마다 전주에서 올라오시는 김판수 선생님께 쫑알거리며 일렀고 나중에 다녀오신 선생님께서 ‘가슴을 치는 작품이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시더군요.

여전히 수요일마다 모금함을 들던 그해 겨울 2011년 12월 14일, 1000차 집회 날, 애타게 염원했던 평화비 ‘소녀상’이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 세워졌습니다.

트럭을 개조해 만든 단상에 깡마른 김복동 할머니께서 오르셨습니다.

“일본 천황은 들어라!”

준엄한 그 호령에 숨도 쉬어지지 않게 눈물을 쏟으며 그래도 뭔가 한 매듭이 지어지려나, 애타면서도 평소 잘 가지지 않던 기대심도 한편으로는 슬몃 들기도 했지요.

그러나 우리의 정의롭고 당연한 염원은 이뤄지지 않았고 우리의 등대이셨던 복동할매도 다른 세상으로 거처를 옮기셨습니다.

지난해 초여름, 추상같지만 속으로 한없이 따스하셨던 복동할매를 ‘즈그 친할매보다 더 잘 모셨던’ 쉼터의 손영미 소장님을 우리는 원통하게 놓쳤습니다.

자주 못 봐도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손 소장님은 우리에게 변변한 인사도 없이 할머니 곁으로 떠나버렸습니다.

기막힌 빈소에서 십 오륙 년 전, 쉼터가 서대문에 있던 시절 오이지 싸 들고 학생들 몰아 할머님들 찾아뵙던 넋두리를 울면서 늘어놓는데 곁에 있던 키 큰 사나이의 눈이 두 번째로 휘둥그레집니다.

“오이지? 그거 끓는 소금물로 어찌한다면서요?”

“왜요, 몇 개 드릴까?”

그렇게 평화비 만든 김운성 작가네와 손 소장님과 이별하면서 오이지 한 구좌를 텄습니다.

싸 들고 서대문에 가면 “어마나…” 반색하며 서둘러 부엌으로 향하시던 길원옥 할머니께도 이제는 잡수시라 전하기 어려워졌고, 여름이면 기다리던 몇몇은 이제 전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나 누구를 주나 서글퍼지는 마음인데 다행입니다.

먹을 것 지천으로 넘쳐나는 요즘 오이지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일까마는 서울 위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는 그래도 한여름 집어먹을 만한 건건이인지 더러 반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가 곁에 있으면서 마음 나눌 수 있어 고마운 분들이니 이거라도 하면 좀 덜 미안하기 때문일 겁니다.

지금은 못 잡수시는 할머니들이지만 우리에게 저항할 힘을 주셨고 그 힘 받아 평화비도 제작한 사람들, 그리고 빛 안 나는 자리에서 온갖 험담 들으면서도 꿋꿋하게 잘 지켜주는 눈 밝고 꿋꿋한 정의연 식구들은 제 감사를 받을 의무가 있기 때문에 오이지 구좌는 유효할 겁니다.

일반 - 익명

수요시위는 내가 처음으로 참여해 본 집회였다. 동아리를 통해서 처음으로 수요시위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후 꽤나 자주, 짧지 않은 시간동안 수요일에는 종로 평화비 앞을 찾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집회에 대해 떠올린다면 깃발이 나부끼고, 굉장히 치열한 구호들이 오가는 결의 높은 자리라고 생각되기 마련이다. (아니면 나만 가지고 있는 집회에 대한 편견일수도..)

그러나 수요시위라는 공간은 어떨 때는 굉장히 치열한 투쟁의 공간이기도, 어떨 때는 다양한 사람들이한 자리에 모여 서로 연대하는 평화의 공간이기도 했다.

나도 그렇고 수요시위에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은 수요시위를 통해, 피해생존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무엇인지, 반전평화라는 것은 무엇인지, 연대라는 것은 무엇인지 한 번쯤 고민해보았을 것이다. 수요시위가 열릴 때, 평화로 거리는 다른 곳에서는 쉬이 이야기하기 어려운 반전평화, 인권이라는 가치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를 한 번쯤 고민해보게 하는 말 그대로 평화의 공간이 된다.

수요시위가 반전평화, 인권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피해당사자인 할머니들이 운동의 주체로서 꿋꿋이 그 자리에서 투쟁해 나갔기 때문에, 더 나아가 이 사회에 존재하는 무수한 아픔들과 연대하며 끝끝내 인권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피해당사자에서 운동의 주체가 되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기까지, 지금의 “평화”와 “인권”을 상징하는 수요시위를 만들기까지 얼마나 치열한 투쟁들이 있었을지 감도 오지 않는다. 그 곁에서 피해당사자들을 만나고 이들을 운동의 주체로, 운동가로서 이끌기까지 활동가들이 또 얼마나 피땀 흘리는 노력을 해나갔을지 역시 감도 오지 않는 영역이다. 동아리 사무실에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판넬 사진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전경들이랑 마주보며 시위를 하고 있는 할머니들이 계신다. 그러한 투쟁들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수요시위를 만들어 내었을 것이다.

어쨌든 수요시위에서 함께 했던 경험들은 지금의 내가 지향하는 가치들을 만들고, 활동가로서의 삶을 다짐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종종 내 삶에서 오는 고민이나 결정의 순간에 할머니들과 수요시위에서의 발언들이 아른아른거릴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내가 이 운동을 통해서 무엇을 배웠었는지, 내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는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는 것 같다.

예전에 가끔 할머니들께 인사를 드리면 언제나 하셨던 말씀이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씀이었다. (특히 김복동 할머니가 자주 그러셨다.) 안타깝게도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못했고, 데모꾼이 되는 길을 선택해버렸지만, 어찌되었든 할머니들께서 지향하셨던 가치들을 이고 앞으로도 꾸준히 살아보고자 하니 그걸로 봐주셨으면 좋겠다.

일반 - 김경린

**<**나와 수요시위 : 나를 바꿨던 그 날>

대학생 수원평화나비 김경린

중학교 1학년 설날을 앞둔 추운 수요일, 엄마의 손을 잡고 처음 수요시위에 나갔다. 유모차를 타고 있는 아이, 교복을 맞춰 입고 온 고등학생, 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있는 할아버지까지 추운 겨울임에도 종로 일본대사관 앞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그동안 생각해왔던 시위는 어른들이 띠를 두르고 큰소리로 의사를 표시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처음 만난 수요시위는 그동안 생각한 시위, 집회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바위처럼 단단하게 살아가자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도 했고 학생들이 카드섹션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했다. 시민들은 ‘일본 정부는 공식 사죄하라’, ‘할머니 힘내세요’ 등 다양한 문구가 적힌 팻말과 노란 나비를 흔들었다. 김복동 할머니는 “위안부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지 않는 것이 속상하다”며 “일본은 공식 사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추운 겨울에도 함께해줘 고맙다”고 시민들에게 감사함을 표현했다.

그날의 수요일은 나에게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장시키는 시작점이 됐다. 이전까지는 뉴스에 나오는 사회문제들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수요시위에서 직접 할머니를 뵙고 사회를 바꾸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수많은 시민을 보며 그동안 안일하게 살고 있었음을, 나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이후 방학 때마다 가족 또는 친구들과 함께 수요시위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시위에 참여하는 것에만 의미를 두었다. 그러나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이후에는 시위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시민들이 몇 년간 목소리를 내고 할머니들이 역사적 증언을 이어가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여전히 눈을 막고 있고 우리나라 정부는 피해자와 아픔의 역사를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다짐했다.

중학교 3학년, 역사 동아리를 만들어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소논문을 만들어 학교 학생들 앞에서 발표했다. 친구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들어보기만 했지 잘 알지 못했다”며 “몰랐던 사실과 역사를 알려줘서 고맙다”라고 말했다. 고등학교 1학년, 2016년에는 수원시청 앞 ‘박근혜 퇴진 범국민대회 수원시민 촛불 전야제’에 참여해 발언하기도 했고 2017년 독일 평화의 소녀상 건립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2013년 수요일, 그날의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사회문제를 외면하고 자신의 삶을 살기 급급했을지 모른다. 누군가의 아픔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다른 이들과 연대해 사회의 불의에 맞섰던 경험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14분 살아계신 현시점, 과거 불의의 역사와 일본 정부에 맞서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내가 용기를 내고 불의를 마주했던 것처럼 더 많은 이들이 불의에 항의하고 함께 연대해주기를 바란다.

해외 - 이윤서 (미국)

My Wednesday Demonstration: Who I Am

Everyday after dinner, my parents and I sit around the television and watch the Korean evening news. Because I do not have very many opportunities to come across Korean news channels living as a teenager in Texas, I enjoy this time of my day when I can sit down and learn about different incidents that are happening all the way across the world in my home country. At the beginning of this year, just like any other day, we were watching the evening news when a story that intrigued me came on. It was about a professor named John Mark Ramseyer, and the controversy surrounding his claims regarding comfort women. I started to do my own research to find out more about the situation and the intensity of it. As I looked closer at the details, I was furious. There were countless claims that were false and invalid, and I was angry at myself for not being able to aid in spreading awareness and correcting the issue for people with wrong perceptions. I started to look for different activities that I can participate in when I came across the Wednesday Demonstrations.

I soon learned that the Wednesday Demonstrations are live streamed online. The fact that they have been going on for almost 30 years automatically pulled me in to take part. I participated in the streaming and watched previous live streams so that I can get to see for myself the effort people have been making for three decades to obtain justice. Seeing butterflies that seemed ready to take-off and the yellow wave of people made me realize that the weekly protest was not just a mere “protest.” Wednesday held so much more meaning, enough to flip over my entire perspective of Wednesday being just another boring weekday. It was a day of bravery and courage, a day of criticism, and a day of struggle to correct the wrongs.

Every Wednesday meant something new- a new hope for the future, a new viewpoint, and a new fight. A day that was simply just the “middle of the week” was suddenly not so average anymore. It became a day full of contrary anticipation. In a way, it is a day of a new start, a new beginning to continue the fight to redress and revise the inaccurate claims that are constantly twisting our history. On the other hand, it is also a day of another confrontation towards the shameless Japanese government and their unwillingness to make a proper apology. Most importantly, Wednesday is a day of recognizing the past and making amends for the tragic events that have happened. I believe that without acknowledging the past, the future will not come. As Winston Churchill once said,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

The Wednesday Demonstrations also provided me with a sense of identity. Our history defines who we are as well as the world we are living in. As a Korean teenager living in the United States, I often have to remind myself of where I come from, and where my culture lies. It is easy to forget these aspects of who I am when I am living as a minority thousand miles away from my home country. After educating myself on the Wednesday Demonstrations, Wednesday became a day of reminding myself of my roots and how that root reaches into my heart. The Wednesday Demonstration now deeply takes part in defining who I am, therefore it highlights the importance of teaching the right history without sugar coating or twisting its truths. The Wednesday Demonstration symbolizes truth itself, and without the truth, I, myself, would not exist. 

(한국어 번역본)

나와 수요시위: 나는 누구인가

             매일 저녁식사를 한 후, 부모님과 저는 TV로 한국 뉴스를 찾아봅니다. 텍사스에 사는 청소년인 저는 한국 뉴스채널을 접할 기회가 많이 없기 때문에, 세계 반대편인 우리 나라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소식을 배우는 시간이 즐겁습니다. 올해 초, 평소와 같이 저녁 뉴스를 보던 중 흥미로운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존 마크 램지어라는 교수의 ‘위안부’ 관련 주장이 논란이 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어떤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혼자서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알아갈수록 화가 났습니다. 잘못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고, 제가 이 문제를 제대로 알리고 잘못된 인식을 가진 사람들을 정정하는 데 도움이 못 되고 있다는 게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알아보던 중, 수요시위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수요시위가 온라인으로 진행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30여년 동안 이어진 시위라는 점이 저를 참여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온라인 수요시위에 참여하고, 다른 사람들이 지난 30여년 간 정의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전 동영상도 챙겨보았습니다. 곧 날아갈 것만 같은 나비들과 노란 물결을 이루는 사람들을 보며, 수요시위가 단순한 ‘시위’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요시위로 인해, 수요일은 더 이상 지루한 평일 중 하루가 아니었습니다. 수요일은 용기의 날, 비판의 날, 그리고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날이었습니다.

매주 수요일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희망, 새로운 관점, 그리고 새로운 투쟁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었습니다. ‘한 주의 중간’이었던 수요일이 더 이상 평범한 날이 아니라, 기대되는 날이 되었습니다. 수요일은 우리 역사를 왜곡하려 하는 허위주장에 맞서고, 바로잡는 투쟁을 위한 새로운 시작의 날입니다.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사죄하려 하지 않는 일본정부에 대해 맞서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요일은 과거를 기억하고 비극적인 역사를 바로잡는 날입니다. 윈스턴 처칠이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한 것처럼, 저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 하면, 미래는 오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수요시위는 저에게 정체성을 심어 주기도 했습니다. 우리 역사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려줍니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 청소년으로서, 저는 제가 어디서 왔는지, 우리 문화는 어떤 것인지 자주 되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나라로부터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소수민족으로 살다 보면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잊기 쉽습니다. 수요시위에 대해 배우면서, 나의 뿌리는 무엇이고,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수요일마다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수요시위는 이제 제 정체성에도 큰 부분이 되어, 진실을 미화시키거나 왜곡시키지 않고 올바르게 교육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요시위는 진실 그 자체입니다. 진실 없이는 저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해외 - 마쓰무라 노리코 (일본)

「おんま どぅ くれっそ!」

松村徳子(まつむらのりこ)

1992年に水曜デモがはじまったとき、私は20歳代最後の年で、2歳になる息子を育てていました。

当時、1991年の金学順さんのカミングアウトを契機に、「慰安婦」問題が広く報道されるようになり、テレビや新聞で見かけない日はないと思えるほどでした。私は高校教員なので、新聞記事を使って生徒たちに、「慰安婦」問題について考えさせることもありました。

また、私の住む奈良でも、「人権、平和、女性」などの課題に取り組む市民団体や労働組合などが連帯し、金学順さんの証言集会が開催されました。寒い季節、夜の集会でしたが、500人ほどの会場の座席がいっぱいになり、床に座り込んで参加している人もいました。仕事のあと、息子を保育所に迎えに行き、軽食を食べさせながら、金学順さんの証言を聞きました。2013年5月、金福童ハルモニと吉元玉ハルモニが、奈良に来て証言してくださったのもその会場でした。

私がはじめて訪韓したのは1995年3月でした。水曜デモに参加したいと思いました。大使館まで歩いて行けるように、近くのホテルをとり、地図でしっかり見たつもりだったのに、たどり着く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言葉も文字も分からないのに、無謀でした。3月のソウルの寒さもその時はじめて知りました。風の吹くなか、息子の手を引いて信号待ちしていたら、今の私ぐらいの年の女性が近づいてきて、息子を指さして何か言っている。どうやら怒っているようでした。私が「分からない」というジェスチャーをすると、息子の前にしゃがみこみ、半開きになったコートのボタンを一番上までとめ、マフラーをきつく巻き直して、「これでよし!」というふうに、去っていきました。「こんなに寒いのに、コートのボタンしっかりしめてあげなさい!!こどもが寒くてかわいそう!!本当に最近の若いおんまは!!!」と、言ったかどうかは分かりませんが、ソウルという大都会の真ん中で出会った情のあつさにただ驚きました。

数年後、奈良の夜間中学で学んでいた韓国人夫妻と知り合いになり、韓国に帰る時に「遊びに来てください。案内します」と言ってもらいました。水曜デモのことを話して約束をとりつけ、何年越しかでやっと念願のソウル日本大使館前に行くことができました。たいへん暑い日でしたが、たくさんのハルモニ方が参加されていました。こんなに暑いのにと、胸がいっぱいになりました。でも、私はその後ろに自分が立っていいものかどうか、逡巡してしまい、少し離れて水曜デモを見ていることしかできませんでした。今ならわかります。日本人である私が先頭に立って、日本大使館に抗議の声をあげるべきだと。でも、その時は、出来ませんでした。それから何度も、日本大使館前に行っては、そっと水曜デモを見ていました。

そして、やっと水曜デモに参加できた日。私は40歳代になり、もうとっくに息子の手を引く必要はなくなっていました。友人から「日本ではじめて、『慰安婦』問題の決議をあげた宝塚の人たちが、水曜デモに行って劇をするらしいよ。一緒に参加しよう」と誘われ、参加することにしました。劇の内容はたしかこうでした。「市のイベントでチマチョゴリを着た生徒への民族差別発言があり、問題を認識した教員らによって、この問題について子どもたちが考え、認識を変えるよう、取り組まれていく」そして、教員の話を聞いて、「おんま どぅ くれっそ!」「おかあちゃんも、(チマチョゴリや、それを着る朝鮮人のことを悪く)言ってたよ!」と言う小学生が、私の役でした。たった一つの台詞でしたが、ハルモニ方に見てもらうのですから、通じるのは難しくても、大きな声で言おうと練習しました。「おんま どぅ くれっそ!」日本の植民地主義は、国だけでなく、親から子、孫へと受け継がれ、日本軍性奴隷制度のような非人間的な行為を「可能」にしてしまった。その克服のために自分は何をするのかという、とても大事な問いかけの台詞だと思いました。なんとか自分の台詞を言い終えて、アピールのあと最後に参加者みんなで韓国独特の3回くり返すデモコールを日本大使館に向けて叫んだ経験は、何物にも代えがたい、私の節目になりました。

その日を契機に、「慰安婦」問題を共通点とした友人が日本にも韓国にも増えていきました。あれから何度も、日本軍「慰安婦」問題関西ネットワークの仲間たちと水曜集会に参加し、そのたびに出会いを重ねてきました。今は、コロナ感染症のために韓国に行けないし、日本国内でも心配なく集まることが難しい状況ですが、だからこそ、安全に配慮しながらできることは何でもやろうと努力しているのが、日本軍「慰安婦」問題の活動家たちだと思います。各地の水曜集会をwebで見て、「みんな頑張っている」と励まされます。その姿は、女性の人権、平和、連帯そのものです。

あの幼かった息子が親になり、授かった孫娘はもうすぐ4歳です。

未来への責任は私たちにあります。

子どもたちに平和な世界を。もし、誰かが被害を受けるようなことがあったとしても、その人が責めを負うことのない世界を。どんな暴力もいけない。

つないできた1500回の希望、希望、希望。

そんな言葉を反芻しながら、孫の手を引いて、平和路に立てる日を思っています。

(한국어 번역본)

“엄마도 그랬어!”

                            마쓰무라 노리코(松村 徳子)

1992년에 수요시위가 시작됐을 때 저는 20대의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었고 2살배기 아들을 키우는 중이었습니다.

당시에는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계기로 ‘위안부’ 문제가 널리 보도되고 있었는데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안 보이는 날이 없다고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교사로서 신문기사를 이용해 학생들에게 ‘위안부’ 문제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는 나라(奈良)에서도 ‘인권, 평화, 여성’ 문제에 열성적인 시민단체나 노동조합 등이 연대해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집회를 개최했습니다. 추운 계절 어느 저녁에 열린 집회였지만, 500석 정도 되는 장내 좌석이 가득찼고 바닥에 앉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일을 마치고 아들을 어린이집에서 데려와 밥을 먹이면서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2013년5월 나라에 김복동 할머니와 길원옥 할머니가 와서 증언하신 곳도 같은 장소였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것은 1995년3월이었습니다. 수요시위에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대사관까지 걸어 갈 수 있게 근처 호텔을 예약했고 지도를 보고 분명히 길을 확인해뒀지만 찾아갈 수 없었습니다. 말도 글도 모르는 곳에서 무모한 행동이었습니다. 서울의 3월 추위도 그 때 처음 알게 됐습니다. 바람을 맞으며 아들 손을 잡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의 제 나이 정도 되는 여성이 다가와 아들을 가리키며 뭐라고 말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화가 난 것 같았습니다. 제가 ‘모르겠다’는 제스처를 취하니 아들 앞에 주저앉아 반쯤 열려진 코트 단추를 맨 위까지 잠그고 머플러를 단단히 다시 멘 뒤 “이제 됐다!”라는 듯 떠나갔습니다. “이렇게 추운데 코트 단추를 제대로 잠가 줘야죠! 애가 추워해서 어쩌나!  하여간 요즘 젊은 사람들이란!” 이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서울이라고 하는 대도시 한복판에서 깊은 정을 느낀 것에 무척 놀랐습니다.

몇 년 뒤 나라의 야간 중학교 학생이었던 한국인 부부와 친해졌는데, 한국으로 귀국하던 날 “놀러 오세요. 안내할게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수요시위 이야기를 하며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몇 년 후에 드디어 염원하던 서울 일본 대사관 앞으로 가게 됐습니다. 몹시 더운 날이었는데, 많은 할머니께서 참여하시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더운 날에 나와 계신 모습을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뒤편에 제가 서도 되는지 망설이다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수요시위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일본인인 제가 앞장서서 일본 대사관에 소리 높여 항의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 때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나서 몇 번이나 일본 대사관 앞으로 가서 가만히 수요시위를 지켜봤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수요시위에 참가하게 된 날, 저는 40대가 되었고 이제 아들 손을 잡고 오지 않아도 됐습니다. 친구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 관련 결의를 통과시킨 다카라즈카 사람들이 수요시위에 가서 연극을 하나봐요. 같이 가요.”라고 해서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연극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시가 주최한 행사에 한복을 입은 학생에 대한 민족차별 발언이 있었는데, 문제를 느낀 교사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어린이들이 생각해 보게 하고 인식을 개선하는데 힘쓰기 시작합니다. 그런 교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엄마도 그랬어!” “엄마도 (한복이나 그걸 입은 사람들에 대해 안 좋게) 말했어요!”라고 한 초등학생이 말하는데, 그것이 저의 역할이었습니다. 단 한 마디의 대사였지만, 할머니들께서도 보시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큰 소리로 말하려고 연습했습니다. “엄마도 그랬어!” 일본의 식민지주의는 국가뿐만이 아니라 부모에게서 자녀로, 손자손녀로 계승됐으며 일본군성노예제도와 같은 비인간적인 행위를  ‘가능’하게 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정말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대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든 저는 제 대사를 잘 마쳤고 시위의 마지막 순서로 참가자 모두가 함께 일본 대사관을 향해 한국적인 방식으로 구호를 세 번 반복해 외쳤습니다. 이 경험은 저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한 대목이 됐습니다.

그 날을 계기로 ‘위안부’ 문제를 공통의 관심사로 하는 친구들이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늘어났습니다. 그 후 몇 번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간사이 네트워크의 동료들과 수요시위에 참가했고 그 때마다 만남을 계속 이어왔습니다.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한국에 갈 수 없고 일본 국내에서도 마음 편히 모이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 활동가들은 그렇기 때문이야말로 안전하게 서로 배려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고자 애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지에서 열리는 수요시위를 인터넷으로 보고 모두 열심히 하시는 모습에 힘을 얻었습니다. 그 모습은 바로 여성의 인권, 평화, 연대 그 것이었습니다.

저의 어린 아들은 아버지가 되었고 손녀는 이제 곧 네 살이 됩니다.

미래에 대한 책임은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평화로운 세상을. 만일 누군가가 피해를 겪는 일이 생긴다고 해도 그 사람이 비난을 받는 일이 없는 세상을. 어떠한 폭력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계속 이어져 온 1500회의 희망, 희망, 희망.

이런 말을 되새기며 손자 손을 잡고 함께 평화로에 설 날을 상상해 봅니다.

해외 - 방청자 (일본)

水曜デモ1500回 エッセイ

=ハルモニたちが拓いた世界を引き継いでいきます=

ソウル日本大使館前水曜集会に参加されているハルモニたちに連帯しようと、2005年10月から大阪駅前水曜集会がスタートしました。毎月第1水曜日19時から開催して今年で16年、180回を数えます。十数人から始まった水曜集会はその後毎回50~60人が参加、多い時は100人にもなりました。2009年頃から「在日特権を許さない会」の激しいヘイトスピーチや妨害が始まりました。これに警察権力が加担して解散させられたこともありました。悔しさに涙で抗議したことも1度や2度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

そんな時に、ハルモニたちが雨の日も風の日も、照り付ける夏の暑さの中でも街頭に立ち続けた意味を考えました。民族解放から半世紀もの間、ハルモニたちは被害者でありながら誰にも被害を語れず、罪人のように生きてこられました。家父長制と構造的女性差別が根付いた社会で、街頭に立ち続けること、被害を語ることはどれほど勇気のいることだったでしょうか。隠された歴史の真実を明らかにしようと、性暴力被害を堂々と語る姿は私たちの胸を打ち、叱咤しました。

その後、ハルモニたちは水曜デモの場から飛び出し、世界各地を回りながら日本軍性奴隷制の実態を訴え、戦争のない平和な社会、女性や少女たちの尊厳が守られる社会の実現を訴え、人権活動家として世界を飛び回りました。

2017年アメリカで起こった「#MeToo」運動が瞬く間に拡がり、世界中で共感を得たことの背景には金学順ハルモニをはじめ、日本軍性奴隷制被害者たちの告発があったことを私たちは記憶します。

歴史の事実をあきらかにし、加害責任を問う訴えは30年の歳月を経て、多くの被害者が亡くなられた今なお続きます。加害者である日本政府が歴史を否定し、被害者を侮辱するという二次被害を繰り返しているからです。そればかりか、戦争によって二度と誰も同じ被害にあわないことを願い、訴えたことが無残に踏みにじられ、今も紛争地における女性への暴力や、現代社会における根深い女性蔑視と性暴力に苦しむ女性たちがいます。

水曜デモの現場で、当初被害者に向けられた無関心と冷たい視線は大きく変化し、被害者の声に耳を傾け、ともに学ぼうと若者・学生をはじめ全国各地から、時には日本をはじめ世界各地から人々が集まってきました。1000回水曜集会の、「平和の少女像」建立時の怒涛のような人々の喊声と感動はまだ記憶に残っています。ところが、1500回を迎える今日、水曜デモを妨害しようとする韓国保守勢力らの恥ずべき行為に対して毎回恥ずかしくて情けない気持ちでいっぱいになります。

そんなときも、いつも私たちを励まし、背中を押してくれたハルモニたちの姿を想い起しながら、日本での連帯行動もコロナ禍、休むことなく開催しています。

最後まであきらめることなく、希望を忘れないで、ハルモニたちが拓いた世界を世代をつないで引き継いでいきます。

2021年7月1日

方清子(日本軍「慰安婦」問題解決全国行動/関西ネットワーク)

(한국어 번역본)

수요시위 1500차 에세이

=할머니들이 열어 주신 세계를 계승해 가겠습니다=

서울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에 참여하고 계신 할머니들과 연대하고자, 2005년 10월부터 오사카역 앞에서의 수요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매월 첫 번째 주 수요일 19시부터 개최하여 올해로 16년, 180차가 되었습니다. 수십 명으로 시작된 수요시위는 그 후로 매회 50~60명이 참가하며, 많을 때는 100명에 달하기도 하였습니다. 2009년 무렵부터는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의 과격한 혐오발언과 방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 경찰권력이 가담하여 저희를 해산시킨 적도 있었습니다. 분한 마음에 눈물로 항의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할머니들이 비 오는 날에도 바람 부는 날에도, 햇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의 더위 속에서도 계속해서 길거리로 나가신 의미를 생각하였습니다. 민족해방으로부터 반세기 동안, 할머니들은 피해자이면서도 누구에게도 피해를 이야기하지 못하고 마치 죄인인 것처럼 살아오셨습니다. 가부장제와 구조적인 여성차별이 뿌리내린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길거리로 나서는 일, 피해를 이야기하는 일은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까요. 가려진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성폭력 피해를 당당히 이야기하는 모습은 저희들의 가슴을 울리고 질타하였습니다.

그 후 할머니들은 수요시위의 장에서부터 뛰어나와, 세계 각지를 돌며 일본군성노예제의 실태를 호소하고,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 여성과 소녀들의 존엄이 보호받는 사회의 실현을 호소하며 인권활동가로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셨습니다.

2017년 미국에서 일어난 ‘#MeToo’ 운동이 눈 깜짝할 사이에 확대되고 전 세계에 공감을 불러 일으키게 된 배경에는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한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들의 고발이 있었음을 저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명백히 하고 가해의 책임을 묻는 소송은 30년의 세월을 거쳐 많은 피해자 분들이 돌아가신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해자인 일본 정부가 역사를 부정하고 피해자를 모욕하는 2차 가해를 반복해서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두 번 다시 전쟁으로 인해 같은 피해를 입지 않기를 바라고 호소한 일은 무참히 짓밟혀, 지금도 분쟁지에서의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현대사회의 뿌리깊은 여성 멸시와 성폭력으로 괴로워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처음 수요시위의 현장에서 피해자들이 받았던 무관심과 차가운 시선은 크게 변화하여,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배우고자 청년・학생들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때로는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1000차 수요시위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할 때의 노도와 같던 함성과 감동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1500차를 맞이하는 오늘날, 수요시위를 방해하려 하는 한국 보수세력들의 부끄러운 행위에 매번 창피하고 한심스러운 마음이 가득해집니다.

그러한 때에도 늘 저희를 격려하고 등을 밀어주신 할머니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일본에서의 연대활동도 코로나 상황 속에서 쉬지 않고 개최하고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잊지 않으며, 할머니들이 열어 주신 세계를 세대를 이어 계승해 가겠습니다.

2021년 7월 1일

방청자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전국행동/간사이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