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나를 부르는 말
2021년 12월 13일2021년 11월 29일 할머니 방문 후기
<할머니가 나를 부르는 말>
‘겨울’
겨울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칼바람에 챙겨입은 두꺼운 외투를 입은 사람들, 그리고 가족끼리 모여 김장하는 모습도 떠오릅니다.
이날 할머니를 위해 준비한 선물에도 겨울 내음이 잔뜩 묻어있었습니다. 서대문 마포 은평 아이쿱 생협에서 우리 할머니들을 위해 김장 김치를 보내주셨거든요. 그리고 구로 코리아에서는 좋은 쌀을 지원해주었습니다. 끓여도 볶아도 그냥 먹어도 맛있는 김치, 이듬해 우리 할머니 밥상을 책임져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차에 한가득 실었습니다.

차창밖은 회색빛이었습니다. 비가 올락, 말락 꾸물거리는 날씨를 무시하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할머니 집에 도착했습니다. 이번에는 정의연에서 가장 막내이자 신입 활동가인 기린과 같이 왔습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기린을 보니, 할머니께 처음 방문했던(링크) 지난 1월의 제가 겹쳐보였습니다
<서울 할머니>
16키로에 달하는 김장김치를 들고 문앞에서 끙끙대고 있으니 곧 반가운 할머니 얼굴이 문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할머니~”
춥지 않냐며 얼른 들어오라 손짓하시는 할머니. 정말이지, 볼 때마다 정정하십니다. 우리를 반기는 그 고운 손에 깍지끼고픈 맘을 뒤로한 채 모두 손을 박박 씻었습니다. ‘코로나야 저리가라’ 속으로 되뇌였습니다.
작은 거실에 할머니와 마주앉아 준비해온 선물을 차례로 꺼내었습니다. 네모난 통에 한가득 담긴 김장김치를 보신 할머니는 ‘그러면 오늘 저녁부터 먹으마’ 하시며 둥글게 웃으셨습니다. 할머니가 미리 말씀해두셨던 고기와 스카프도 전해드렸습니다. “수고했다.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입과 눈이 호를 그렸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우리를 죽 훑어보시더니 대뜸, 이쁘다, 을매나 이쁜지 몰라. 하시며 까만 눈동자에 저희를 천천히, 차곡차곡 담으셨습니다. 90세가 넘은 할머니께서는 별안간 기린과 저를 향해 ‘애기가 왔어’하십니다. 그리고선 덩치가 산만한(?) 애기들 옆에 앉아있는 조그만(?) 포카를 가리키며 ‘너는 전화 잘받는 아이지? 정말 예쁘구나’ 하십니다. 포카는 평소 우리 중에서 할머니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활동가입니다. 내가 보는 것과는 다른, 할머니만 알고계시는 포카의 모습이 까만 눈동자 너머 가득했습니다.
갈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니 할머니께서 활동가들의 손을 하나하나 꼭 잡아주셨습니다. 마음이 찡해져 저도 할머니 손을 꼬옥 잡았더니 할머니께서 화들짝 놀라셨습니다.
“손이 왜 이리 차갑니??”
할머니는 깜짝 놀란 얼굴로 이내 제 양 손을 당신 양 손에 가둬 앞 뒤로 싹싹 비비셨습니다.
‘할무니, 원래 맘이 따뜻하면 손이 차가운 거랍니..’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풀어드릴겸 썰렁한 농담을 해보았지만 할머니는 단호하셨습니다. 옆에서 기린이 소리죽여 킥킥 웃었습니다. 그사이 제 손은 거짓말처럼 따끈따끈해졌습니다.
할머니께서는 건너편 안방으로 보이는 헝클어진 이부자리를 가리키며 요새 밤에 잠을 못자서 고민이라 하셨습니다. 앞서 백신을 맞은 날 제대로 주무시지 못한 뒤, 지금까지 밤낮이 바뀐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님께서는 영 걱정이 되셨는지 할머니께 낮에 졸려도 밤에 자려고 노력해야 한다며 두어번 강조했습니다. 그리고서는 할머니의 약지에 당신의 약지를 걸었습니다.
‘약!속!’
엄지끼리 꽝! 선명히 찍힌 지장,
할머니의 불면에 마침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경기도 할머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옷매무새를 단장했습니다. 복도식 아파트 현관문 앞에 서서 벨을 눌렀지만, 유독 귀가 어두우신 할머니께서는 답이 없으셨습니다. 전화도 받지 않으셔서 이집이 아니었나? 의심하는 와중에 핸드폰 너머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으응, 그래 들어와 들어와”
문을 열자마자 얼른 들어오라고 재촉하시는 말씀에 모두 서둘러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갔습니다.
짐을 풀면서 준비한 선물을 주섬주섬 꺼내고 있는데, 할머니께서 대뜸 이사님을 가리키며 말씀하였습니다.
“ 난 이 냥반, 남잔 줄 알았지 뭐야~”
할머니가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 끝에는 귓등이 보일만큼 짧은 머리를 한 이사님께서 동그랗게 눈을 뜬 채 서 계셨습니다. 그 뒤로 이사님께 아저씨라는 부캐가 생겼답니다.

(왼) 짧은 머리를 하고 있는 이사님
선물을 드릴 때도,
‘아저씨, 고마워~’
간식을 내주면서도,
‘아저씨~이렇게 여자랑만 놀면 어뜩하나~’
잘가라며 배웅하는 순간에도,
‘우리 아저씨는~ 특별히 잘 가구 또 오셔~’
이날 처음 방문했지만 이사님은 짧은 머리 아저씨가 되어 할머니의 관심을 독차지했답니다. 아저씨, 포카, 기린과 저는 할머니와 마주 앉아 준비해온 선물을 드렸습니다. 고기와 쌀, 김치 그리고 야심차게 준비한 겨울 패딩도 꺼냈습니다.

추워진 날씨 탓에 할머니께서는 즐겨 가던 공원대신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셨다고 하셨습니다. 준비한 외투가 조금이나마 추위를 떨쳐주길 바라며 포카가 직접 옷을 입혀드렸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연신 패딩 주머니를 뒤적이시더니 무엇인가 꺼내셨습니다.
‘여기 돈이 잔뜩 들었잖아?’
양손을 펼쳐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주머니 속 습기제거제였습니다. 할머니의 장난기 가득한 웃음에 활동가들도 핰핰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예고없이 들어온 농담에 경기도 할머니를 만난 게 실감났습니다.
경기도 할머니의 특징은 또 있습니다. 항상 활동가들이 찾아오면 주섬주섬 무엇을 꺼내 오십니다. 물론 이날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활동가들이 만류할 새도 없이 냉장고 앞으로 가셨습니다.
‘할머니 저희 배 터져요. 괜찮아요 정말요!’ 이미 점심을 먹고 왔다고 계속 말씀드려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으셨습니다. 할머니, 우리 정말 배! 터져요!! 할머니의 수고를 덜기 위해 목청을 돋우니 그제야 저를 봐주셨습니다.
‘몰라! 내가 모르는 젊은 말을 써서 나를 놀려’
할머니께서 너무나 태연한 얼굴로 농담을 하시는 바람에 저도 깍깍 웃음이 터졌습니다. 결국 할머니 뜻대로 과자와 음료수 한 상이 뚝딱 차려졌습니다. 우리에게 어서 먹으라 재촉하시는 할머니께서는 정작 이가 좋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볼 때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는지 여쭤보는데 요새도 식사가 어려워 짜 먹는 죽을 주로 드신다고 답하셨습니다.
할머니와 오래오래 지금처럼 장난도 치고, 예쁜 옷도 입혀드리고, 사는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텐데 성치 않은 이와 야윈 할머니 모습에 활동가들 얼굴에도 그늘이 드리워졌습니다. 포카는 냉장고를 열어 할머니가 드시는 죽의 사진을 찍어갔습니다. 할머니마다 필요한 물건이 다르기 때문에 항상 꼼꼼히 체크하는 것입니다.
처음 방문한 티가 팍팍 나는 기린에게 할머니께서 고향이 어디냐 물으셨습니다. 기린이 서울에서 자랐다고 하니 아쉬운 기색이 역력하였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언제나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고향의 흔적을 찾고 싶어 하십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마치 일본군 ‘위안부’ 피해로 잃어버린 과거의 흔적을 찾아보려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쓰라려왔습니다.
시간이 훌쩍 지나, 우리가 떠나야 할 시간이 되자, 경기도 할머니는 언제나처럼 평소 즐겨 드시는 비타민 음료를 저희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괜찮다며 손사레치니 오지 못한 활동가들과 함께 먹으라며 되려 한 상자 더 얹어주셨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언제나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저희에게 베풀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인지 받은 것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타민음료였지만, 그 어떤 피로회복제보다 효과가 좋아보였습니다. 아파트 단지를 떠나며, 우리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드는 할머니 모습을 마음에 꼭꼭 새겨두었습니다.

우리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창 밖으로 손을 흔드는 할머니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할머니들 눈에 비친 활동가의 모습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경기도 할머니는 포카는 아기처럼 예쁜 목소리로 말하는 상냥한 사람, 그리고 서울 할머니에게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이기도 합니다. 기린과 저는 성인이 되었지만 할머니 눈에 여전히 어린 아이입니다. 이사님은 이날 이사 대신 아저씨라는 직함이 생겼고요.
할머니가 이렇게 다양한 수식어를 붙여서 저희를 불러주실 때면 오랜 만남과 소통의 시간이 새삼 피부로 와닿습니다. 활동가와 피해자로 정의되는 피상적인 관계가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뿐인 유대의 관계라는 것을요.
20211130 활동가 지우 작성.